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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이 순간] 여자배구 도로공사 박정아
“리우올림픽때 리시브 불안… 네덜란드에 져 4강 못갔죠
도쿄선 서브 척척 받아내 강팀들 꺾고 4강에 올라
새로 부임한 세자르 감독과 에펠탑 함께 보고 싶어요”
박정아(28·한국도로공사)는 올여름 담대했다. 백미는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일본전. 한국이 5세트 12-14로 끌려가 일본에 한 점만 더 내주면 경기는 물론 8강 티켓까지 헌납할 위기에서 박정아가 전위(네트 앞)에 섰다. 그가 연속 스파이크 득점을 내 14-14 듀스, 일본의 공격 범실로 15-14 역전, 다시 박정아가 일본 블로커와 네트 싸움에서 공을 터치아웃시켜 16-14 경기를 끝냈다. 이 짜릿한 역전승을 발판으로 한국 여자 배구는 4강까지 내달렸다.
김연경조차 코트에 주저앉던 감격의 순간 박정아는 덤덤했다. 그는 올림픽 내내 침착했다. 5세트 접전이 펼쳐진 도미니카공화국전 매치포인트, 일본전 매치포인트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긴장 안 하는 마법의 약이라도 먹은 것일까.
인내에 일가견이 있는 박정아는 2016 리우 올림픽 직후 빗발친 비난을 묵묵히 견디며 배구에만 전념했다. 그가 일군 독한 인내는 올여름 도쿄올림픽에서 꽃을 피웠다. 최근 경북 김천 한국도로공사 연습장에서 만난 박정아는 “요즘 취미로 빵 만드는 법을 배운다”며 환하게 웃었다. /신현종 기자
최근 만난 박정아에게 비결을 묻자 그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올림픽 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저는 벌써 다 잊었거든요. 죄송해요.” 다시 V리그만 바라보며 산다는 그는 훈련에 방해될까 봐 올림픽 직후 쏟아진 TV 출연 요청도 대부분 사양했다. 한국도로공사는 최근 8연승을 질주하며 리그 2위로 도약했다.
계속되는 질문에 박정아가 도쿄의 조각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일본전 마지막 때는 네트 앞 공격수가 저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마음먹고 ‘어디로 어떻게 공을 때리지’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배구 이외 추억은 별로 없다고 했다. “경기 시간이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을 오가서 식사도 잘 못 하고 잠도 설쳤어요. 터키와 8강전 때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다리 테이핑을 했네요.”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일본전에서 공격하는 박정아./연합뉴스
영화처럼 기억하는 장면은 하나 있다. “동메달 결정전이 끝나자 도쿄에 비가 많이 내려서 ‘우리 경기 끝났다고 비가 내리나’ 생각했거든요. 그 비를 맞으며 선수촌 내 기념품 가게에 갔는데, 조금 전 상대했던 세르비아 선수들이 목에 동메달 걸고 오는 거예요. 그 선수들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좋겠다…’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박정아는 도쿄올림픽에서 복수극을 완성했다. 그에겐 2016 리우올림픽 네덜란드와 8강전에서 패배의 주범으로 내몰렸던 아픔이 있다. 당시 네덜란드 사령탑 지오반니 구이데티(49·이탈리아) 감독이 리시브가 불안했던 스물셋 박정아에게 서브를 집중시켰던 까닭이다. 5년이 흘러 터키 사령탑으로 이동한 구이데티 감독과 올림픽 8강전에서 다시 만난 박정아는 과거와 다른 결말을 찍었다.
박정아는 도쿄올림픽 통틀어 서브 187개(리시브 정확 41.7%)를 받아낼 만큼 성장해 있었다. “긴장될 때마다 소속팀 선배 (배)유나 언니가 ‘신이 만회하라고 주신 두 번째 기회’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어요. 결과에 100% 만족하진 않지만 정말 후회 없이 했습니다.”
자기 자리에 진심으로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은 기품이 감도는 꽃 향기가 난다. 박정아처럼./신현종 기자
2011년 프로 생활을 시작한 박정아는 올해 데뷔 10주년을 맞았다. 우승 반지를 네 개(IBK기업은행 3회·한국도로공사 1회) 꼈고, 역대 다섯 번째로 통산 4500득점을 돌파하며 V리그 에이스로 우뚝 섰다. 앞으론 그가 김연경을 비롯해 ‘런던 세대’가 퇴장한 국가대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그는 “연경 언니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홀로 대체할 수 없고, 남은 선수 모두가 힘을 합쳐야 겨우 메울 것 같다. ‘후회 없이 해보자!’ 외치는 연경 언니의 카리스마를 누가 따라 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2022년엔 세계선수권과 항저우 아시안게임,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등 굵직한 국제 대회가 줄줄이 예정 돼있다. 대표팀 사령탑도 세자르 에르난데스(44) 신임 감독으로 바뀌었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님과 헤어져서 아쉬웠는데, 도쿄 올림픽까지 수석 코치로 동고동락했던 세자르 감독님이 오셔서 기뻐요. 데이터 분석 능력으로 정평 난 데다 선수들에게 무척 친절하게 설명해주시거든요.”
박정아는 올해 프로 데뷔 10주년을 맞이했는데 "벌써 10주년, 이제 10주년"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꿈이 많다./신현종 기자
2024 파리올림픽도 조금씩 그려본다. “파리 올림픽 가서 에펠탑을 보고 싶어요. 사실 리우는 지카 바이러스, 도쿄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선수촌 밖에 전혀 못 나가 아쉬웠거든요.”
박정아의 진짜 속내는 따로 있다. “제가 프로 데뷔했을 땐 경기장이 텅 비었었는데 런던·리우·도쿄올림픽을 거치면서 만원 관중이 들어찬 코트가 됐어요. 팬들에게 사랑받는 배구의 기쁨을 후배들과 계속 나누기 위해서, 사명감을 갖고 뛰겠습니다.”
기사제공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jihea@chosun.com